
<안경 めがね> 2007
그러고보니 내일은 영화를 봐야겠어.
어젯밤에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보니 뭘 좀 먹어야겠어, 그런 생각이 들 때처럼.
한번 생각이 들자 당장 영화를 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같은 감독의 전작 <카모메 식당>이 좋았기 때문에 기대하던 <안경>을 보기로 마음 먹고 일찍-그러니까 1시쯤- 잠자리에 들었다.
마포에 볼일이 있어 알람은 9시에 맞춰두었다. 너무 빠르다고 걱정하면서.
일이 없으면 대충 1시쯤 일어난다. 원래 그렇다. 그 편이 생체리듬에 맞는데 어쩌겠는가.
바로 잠이 들긴 했는데 3시 정도에 잠이 깨더니 더이상 잠이 오지 않았다.
한 5시 반 정도-그러니까 평균 취침시각-까지 온갖 잡념 속에서 뒤척거리다가
잔 것 같지도 않은데 알람이 울려 깨긴 깼다.
졸린 눈을 연신 비벼대며 버스를 타고 볼일을 마치고 나니 11시였다.
영화는 스폰지하우스중앙(명동)에서 12시 20분.
시간이 남으면 걸어서 갈 생각이었으므로 콩나물로 지도도 미리 봐 두었다.
이래 봬도 단기적으로는 계획적인 인간인 것이다.
마포에서 명동까지는 공덕로터리에서 갈라지는 2가지 루트가 있었다.
충정로까지 쭉 가서 시청을 지나 가는 길이 하나, 서울역 쪽으로 빠져 남대문을 거쳐 가는 길이 하나.
양쪽 다 보통 걸음으로 1시간 10분 정도 예상이었기 때문에 시간여유가 별로 없는 편이었다.
충정로 쪽 길은 뻔하단 말이지. 안 가본 길(서울역 쪽)이 재밌을 텐데, 길이 이상하면 어떡하지.
그래도 빠르게 걸으면 1시간 안에 갈 수 있을 테니까 시간은 넉넉해. 안 가본 길로 가보자.
아냐, 그러고 보니 서울역이랑 남대문 쪽은 지하도 투성인데. 거기서 괜히 시간 잡아먹는단 말이지.
그냥 안전하게 충정로 길로 가야겠다. 빨리 걷다가 지쳐서 제대로 영화 못 보면 어떡해.
갈팡질팡 고민 끝에 공덕로터리에 이르러 기껏 그렇게 결정을 내려놓고는, 운명의 장난으로 서울역 쪽으로 가게 되었다. 이유는 단순하다. 그쪽 신호등이 먼저 켜진 것이다.
인생이 그렇지 않은가.
밤을 지새워 고민하고 결론을 내려도, 예기치 않은 신호 하나에 일은 다른 방향으로 진행된다.
문제는 내가 충정로 쪽으로 가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신호가 바뀌었다고 해서 확인도 안 하고 무조건 그쪽으로 갔다는 것에 있다. (이것은 다 사거리가 아니라 오거리라서 생긴 일이다)
아파트밖에 없는 큰 언덕을 넘고나니 예정에 없던 효창공원역이 나왔는데, 사거리 표지판에는 용산구청이라느니, 전자상가라느니, 효창운동장이라느니, 서울역과는 멀어만 보이는 지명들이 가득했다.
잘못된 길로 온 건 확실했지만 여기가 어디인지 서울역에서 어느 정도 떨어져있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길이 나올 것 같아 한동안은 무조건 앞으로 걷다가 결국 다시 돌아내려와-정말 패턴대로 사는 인생이다-, 길을 물었더니 버스를 타라고 하더군.
버스 정류장에서 노선도를 보고 루트와 거리를 어림짐작해본 끝에 지금까지 걸은 게 아까워서 계속 걷기로 했다.
효창운동장을 지나 숙명여자대학교를 관통해, 숙명여대 사거리에서 지하철을 타라는 조언을 또한번 무시하고, 무사히 서울역까지 도착해 아는 길이 나왔다고 안심했던 것도 잠시,
속도계산에 남대문과 명동의 인파를 빼먹었다는 실수를 뼈저리게 후회하며, 한창 공사 중인 창고극장 앞의 울퉁불퉁한 언덕을 잰 걸음으로 지나 땀투성이로 영화관에 도착했을 때가 12시 15분이었다.
돌아와서 거리를 계산해보니 6.7km 정도 되는 것 같다. (수많았던 계단은 고려하지 않았다)
어쨌든 하고 싶었던 말은, 영화를 보기 전에 수면부족과 육체피로로 초토화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졸거나, 졸 위기에 빠지거나, 하품이 나오거나 그런 일이 없었다.
그 점이 이 영화의 대단한 구석이다.
사건도 없고 대단한 스토리도 없고 별 대사도 없고 배경도 거기서 거기고
처음부터 끝까지 밍숭맹숭하게 흘러가는데 그것만으로 106분이 모자람 없이 채워진다는 것이다.
그것은 '공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하루종일 조는 봄바다, 서두르거나 조급해 할 일 없는 일상,
그냥 그 자체에 동화되어서 멍하게 1시간 40분이 흘러간다.
이 영화에서 가장 동적인 장면들은 음식이 나오는 순간들이다.
먹고 싶다, 맛있겠다! 참을 수 없이 단순하고도 강렬한 식욕이 뿜어져나온다.
그 외에는 다 5교시 쉬는 시간 같다.
교실의 반 이상이 자고 있는 나른한 공기 속에서, 안 자고 있는 애랑 별 거 아닌 얘기를 하다 쿡쿡 웃음이 나올 때의 평화로움.
<안경>은 비록 영화 사이트에 드라마, 코미디라고 분류되어 있다 할지라도 판타지 영화이다.
장 그르니에는 <섬>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혼자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낯선 도시에 도착하는 것을 수없이 꿈꾸어 보았다. 그러면 나는 겸허하게, 아니 남루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그렇게 되면 <비밀>을 간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장 그르니에, 김화영 옮김, "섬", p.77
이 글을 얼마나 오래 마음에 품고 다녔고, 또 떠나고 싶단 생각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무엇보다 구성원이 너무 적다는 점에서 그르니에가 말하는 '비밀스러운 삶'과는 조금 다르지만, 영화는 이상향을 다루고 있다.
하마다 민박에 계절은 있지만 시간은 존재하지 않고 그에 따라 과거도 미래도 사라진다.
그냥 모두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금 그곳에 있을 뿐인데 그 존재감이 또 엄청나다.
개 한 마리까지도, 의자 하나까지도.
내게 재능이 있다면, 그건 그곳에 있을 재능인 것 같았다. 당장 가고 싶었다. 그곳에 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에, 이상향은 이상향으로, 판타지는 판타지로 남을 수 있다.
다시 한 번 그르니에를 인용하자면,
"순전히 물질적인 구속 외에는 아무런 구속이 없이(그때만 해도 나는 물질적인 구속이 순전히 물질적인 것만은 결코 아님을 모르고 있었다) 지내는 그 이상적인 생활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인위적이며 속이 텅 빈 생활로 여겨지고 말았을 것이다. 처음은 항상 멋지게 마련이다. 다만 그 다음은 멋이 덜해진다."
-"섬", p.80
이상적인 것에는 늘 좀 지루한 감이 있다.
그래서 나는 당장 짐을 싸서 어디 조용한 시골마을로 떠나는 대신,
하마다 민박을 꿈으로 남겨두기로 했다.
하마다 민박에는 '타소가레'를 잘하는 사람들이 모인다.
영화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말인 '타소가레(たそがれ)'는, 자막에서는 '사색'이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사전에는 '황혼', '해질녘'이라는 뜻만 나온다.
어원은 誰(た)そ彼(かれ)로, '누구냐 저 사람은?'이라는 뜻인데, 그로부터 (어두워져서 멀리 있는 사람이 누군지 구별이 안 가는) '저녁'이라는 의미가 되었다.
그것을 동사로 쓴 '타소가레루(たそがれる)-자막:사색하다'도 원래는 '저녁이 되다', '인생이 황혼기로 접어들다'라는 뜻이다.
현대일어에서는 '쓸쓸하다, 풀이 죽다' 이런 의미로도 쓰이고 있는 듯 하다.
이 영화에서는 그 쓰임새가 다른데, 누군가를 생각한다던가, 생각에 잠긴다던가,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하니 있다던가, 그런 뜻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비교적 원래 뜻에 가깝게, '노을을 보고 향수에 젖는다'는 뜻으로 타에코가 쓰기도 하지만, 단순하다고 하루나에게 바로 무시당한다.
그러니까 저마다 조금씩 다르게 받아들이고 자기만의 방식을 만들 수 있는 단어라는 것이다.
(실제 일본 블로그를 좀 뒤져보니 서로 해석이 다 달라서 흥미로웠다)
나로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하니 있고 싶다.
인생의 황혼이 온다면 하마다 민박에 가야겠다.
가서 메르시 체조를 하고 만돌린을 연주하고 팥빙수를 먹고 낮부터 맥주를 마시고
대부분의 시간에는 아무것도 하지 말고 오늘을 바라봐야겠다.
'대단한 관계'가 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지금이 황혼이라도 괜찮겠는데.
+ <카모메 식당>에서도 그랬지만 배우들이 하나같이 훌륭하다. 타에코 역의 '고바야시 사토미'나 사쿠라 역의 '모타이 마사코'(움직임 하나하나가 존경스럽다)는 말할 것도 없지만, 주인장인 유지 역의 '미츠이시 켄'이 토마토를 썰 때는 정말 반했다. 칼질 하는 남자의 손은 왜그리 멋진 걸까! (고기 구워줄 때도 반했다)